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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19세기 화가,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 폴 고갱

by 양양이 2025. 12. 29.

에두아르 마네는 파리에서 1832년 1월 23일에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부유하고 화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어머니 외제니-제지레 푸르미에는 외교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1845년 롤랑 기숙학교에 입학하였고 여기서 미래의 예술부 장관이자, 그의 평생 친구인 안 트네 프루스트를 만나게 된다. 집안에서는 그가 법대에 들어가기를 원하였으나, 집안의 바람대로 법대에 갈 만큼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바람으로 1848년 해군 사관학교에 지원하였으나 떨어지고 말았다. 실패를 거듭하자 아버지는 마네가 하고 싶어 하는 미술을 교육받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는 1850년에서 1856년까지 토마스 쿠튀르르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그림들을 보며 따라 그렸다.

마네는 19세기 현대적인 삶의 모습에 접근하려 했던 화가 중의 하나로 시대적 화풍이 사실주의에서 인상파로 전환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초기작인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는 엄청난 비난을 불러일으켰으나 반면에 수많은 젊은 화가들을 주변에 불러 모으는 힘이 되었는데, 이들이 후에 인상주의를 창조하였다. 이 그림들은 오늘날 현대미술을 창시한 분수령으로 여겨진다. 그의 화풍의 특색은 단순한 선 처리와 강한 필치, 풍부한 색채감에 있다.

1853년부터 1856년 사이 독일과 이탈리아, 네덜란드를 여행하였다. 이때 마네는 프란스 할스와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프란시스코 고야의 영향을 받게 된다.

잘 알려진 그의 주요 작품에는 '피리 부는 소년', '거리의 악사', '올랭피아', '롤라 등 발랑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봄' 등이 있다. 특히 피리 부는 소년 작품은 스페인 여행을 떠났을 때 영감받고, 파리로 돌아와서 스페인의 이름 모를 부대 피리 연주 병을 주제로 그린 것이다. 현재는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858~1859년까지는 당시 주류 스타일이던 사실주의는 받아들였다. 현실적인 주제, 현실적인 사람들을 그리고 현실 속 이야기들을 그렸다. 특히 거지, 카페 손님, 집시, 소싸움 등을 그렸다. 특히 마네는 스승에 대한 반항인지, 아카데미 파에 대한 반감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신화적인 주제나 종교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그린 바가 없다. 1863년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전시되었고, 젊은 화가들이 그를 따랐다. 이것이 인상주의 회화가 시작되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당시 모임에 화가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으나, 마네의 그림에서는 딱히 그런 영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네는 매독에 걸렸다고 알려졌는데, 그 합병증으로 손발이 마비되어 고통스럽게 일생을 보내다가 1883년 4월 30일 수술 후 사망했다. 매독으로 죽었다고 알려진 화가로 폴 고갱, 샤를 보들레르 등도 있다.



외진 앙리 폴 고갱 (1848년 6월 7일 – 1903년 5월 8일)은 프랑스의 화가로 알려져 있는데, 도예가, 조각가, 작가로도 활동했다. 주로 후기 인상주의, 상징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생전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인상주의와는 구별되는 실험적인 색채와, 종합주의 양식으로 후대에 인정받았다. 고갱의 화풍은 틀로 아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대표작들의 주제는 원시주의와 관련이 있다.

고갱의 생애는, 1848년에 유럽 혁명 시기 파리에서 태어났다.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과 어머니 알린 사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클로비스는 당시 34세로 오를레앙에서 이주한 사업가 집안 출신의 자유주의 언론인이었다. 클로비스는 신문에 낸 기고문 때문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았다. 고갱의 가족은 페루로 이주했고, 나름 그곳에서 유복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훗날 고갱은 페루에서 시기를 그의 생애에서 가장 풍족하고 행복한 때로 회상하였다. 고갱의 가족은 나중에 프랑스로 돌아왔는데, 그 사이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다. 고갱의 어머니 알린 파리에서 바느질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고갱은 프랑스에서 정규 교육받았고, 처음에는 증권 중개인으로 일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갤러리나 전시회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71년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증권회사에 취직하였다. 가족과 친한 지인이었던 구스타프 아로사가 마련해 준 자리로 취직 당시 고갱의 나이는 23세였다. 고갱은 성공한 파리지앵 증권 중개인이 되어 11년을 근무하였다. 1882년 금융위기 시절, 그의 주식 중개인 경력에 큰 타격을 입고 본격적으로 화가로 전향하였다.

1873년 고갱은 덴마크 출신의 네 테 소피 가드와 결혼했다. 이후 10년 동안 살면서 둘은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1884년 가족은 코펜하겐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생계를 위해 방수포 판매를 하였으나 실패했다. 11년간 이어져 오던 중산층의 결혼 생활은 고갱이 전업 화가를 하면서 힘들게 되었다. 집안 경제가 어려워지자 헤어지게 되었고, 부부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891년이고 1894년 부인과 결별했다.

증권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1873년 고갱은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1880년대 초 인상주의자들과 함께 작품을 전시했지만, 곧 더 대담한 색채 사용과 전통에서 벗어난 주제를 특징으로 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브르타뉴와 마르티니크에서의 작업은 원주민 생활과 풍경을 묘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890년대에 고갱의 예술은 당시 타히티섬에서 중요한 변환점을 맞는다. 이 시기에 고갱의 그림은 뚜렷한 색채와 상징주의적 주제를 특징으로 한다. 인간과 예술, 자연 사이에서 관계를 탐구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 아방가르드와 현대 예술가, 특히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빈센트 반 고흐와 테오 반 고흐와의 관계도 잘 알려져 있다.